인왕산 물길 따라 세종마을 돌아보기
김지애
김지애
서촌
2023-10-12
코스 : 금청교 터→준수방 터→자수궁교 터→신교 터→선희궁 터→송석원/벽수산장 터→수성동 계곡

주제 : 잊고 있었던 '물의 기억'을 통해 새로운 서울을 상상해보기

<금청교 터>
청계천의 원류인 백운동천 물길에 있던 금청교는 고려 충숙왕 때 건설되어 약 600년 동안 경복궁역 교차로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5군영의 하나인 ‘금위영’이 다리 앞에 있어 ‘금교’라고도 했으며, 발음이 변하여 ‘금천교' 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세 개의 홍예가 뚫린 모양이 마치 안경처럼 보여 ‘안경다리' 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청교는 청계천 광통교 못지않게 아름답고 오래된 다리였는데, 1928년 도로 확장으로 사라져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하문로는 지금보다 훨씬 좁았는데 도시 개발로 현재와 같이 넓은 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준수방 터>
옥류동과 수성동에서 흘러 내려온 지류가 백운동천과 합류하던 지점 뒤쪽의 넓은 지역에 세종대왕이 나신 준수방이 있었습니다. 태종 즉위 이후 이 잠저를 ‘장의동본궁' 으로불렀는데, <세종실록>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이미 관청이 들어서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위가 높은 양반들은 비교적 고지대인 장의동에 살았고 그보다 아랫사람들은 저지대 평지에 살았는데, 장의동은 줄여서 ‘장동’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자수궁교 터>
궁을 떠나야 하는 세종의 후궁들을 위해 문종이 마련해준 처소가 자수궁이었습니다. 자수궁은 이방원의 이복동생 이방번의 집터에 세워졌고, 후에 ‘자수원'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백운동천 물길 위에 자수궁 방향으로 놓인 다리가 자수궁교로 자시궁교, 수궁교, 자수교, 자교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1927년에 찍힌 사진을 보면 교각이 하나인 아담한 다리였으나 1929년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신교 터>
선희궁터 부근에 있던 신교는 백운동천의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위한 사당으로 선희궁을 지으면서 놓은 새 다리라서 ‘신교' 라고 불렀으며, 신교동이라는 이 지역의 이름은 바로 이 다리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신교는 교각이 2개인 제법 긴 다리였는데 이 역시 1920년대 도로 복개 때 사라지고, 현재는 청운초등학교 운동장에 난간석 6개가 남아있습니다.

<선희궁 터>
현재의 농학교/맹학교 자리는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이 있던 곳으로, 운동장 밑으로 궁벽을 이룬 돌과 물구멍을 볼 수 있습니다. 선희궁의 신위가 육상궁으로 옮겨진 뒤에는 조선총독부 소속 의료기관인 제생원의 양육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농학교 본관 앞 화단 아래에도 옛 선희궁 건물 터가 남아있으며, 본관 뒤편으로는 작은 제각을 볼 수 있습니다. 정문에서 보이는 100주년 기념비 뒤쪽의 느티나무 역시 선희궁 터 흔적의 일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학교와 맹학교는 선희궁 터에 있어 예전에는 ‘선희학교’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송석원/벽수산장 터>
중인 출신인 시인 천수경은 인왕산 자락 아래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곳을 ‘송석원’이라 칭하고, 동료 문인들과 시회를 열어 30년 넘게 이어갔습니다. 권력자들이 탐내던 이 땅은 장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에게 넘어갔고, 그는 나라를 팔고 받은 돈으로 이곳에 프랑스풍 저택인 벽수산장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벽수산장은 그의 사후 화재로 철거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현재는 정문 기둥과 아치문 일부, 양관 뒤에 있던 한옥과 2층 부속 건물(현 박노수미술관) 정도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성동 계곡>
1971년에 지어진 옥인아파트 9개 동이 빽빽이 들어서 있던 수성동계곡이 기린교의 발견과 함께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어 2012년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기린교 아래로 흐르는 옥류동천 물길은 여전히 도로 밑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물길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시에서는 경복궁 주변을 흐르는 물길 복원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개발로 인해 잊은 것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