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사라진 벽수산장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서촌여행
문화·예술·역사
이은경
서촌
2023-10-19
코스 : 송석원 터→벽수산장 입구→한옥 별채→박노수미술관

주제 : 우리 기억에서 소멸된 벽수산장의 흔적을 찾아 세종마을 구석 돌러보기

세종마을에는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 있는 인물들... 이번 여정은 그 경계 밖에 있는 인물, 친일파 윤덕영과 그의 별장이자 한양의 아방궁으로 불렸던 벽수산장의 흔적을 찾아가보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작가 심윤경님의 “영원한 유산” 속 주인공이 겪은 고민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 회의에서 강제로 위임장에 어보를 날인하도록 하여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앞장섰고, 1917년 6월 순종을 일본에 입도하도록 하여 일본 천황 앞에 엎드려 절하게 만들었으며, 1919년 고종 사망 후 덕수궁의 북문, 즉 영성문 안쪽을 일본인에게 팔아 이득을 챙겼던 윤덕영.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사금 46만원(현재가치 230억 추정)으로 지은 벽수산장. 지금은 사라져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 흔적을 찾아 보여주고자 합니다.

<송석원 터>
송석원은 조선 후기 시인 천수경이 옥류동 계곡 소나무와 바위를 벗하여 초가집을 지어 송석원이라 부르고, 뜻을 같이하는 중인 문인들과 문예활동을 하던 장소입니다.

100여년이 흐른 후 윤덕영이 그 땅을 매입하여 프랑스식 대저택을 짓고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차용하는데, 무슨 연유인지 이름을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으로 바꿉니다. 벽수산장은 지하1층 지상3층의 건축 연면적이 795평으로 붉은 벽돌과 석재로 마무리가 된 프랑스식 저택입니다. 이곳에 옥류동천과 수성동 계곡의 물길을 끌어들여 뱃놀이가 가능한 200여 평의 연못을 만들었고, 응접실 천정에는 수족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벽수산장을 한양의 아방궁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벽수산장은 1927년 기준 옥인동 전체의 52%에 해당하는 19,468평의 공간으로 존재하다 1945년 이후 적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벽수산장은 이후 1966년 화재로 전소되어 방치되다가 1973년 도시 재정비 사업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벽수산장 입구>
여기는 어떤 안내표시도 없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는 흔적이 있는 입구입니다. 두개의 돌 기둥이 있었고 두 기둥 사이에 철문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입구를 지나 자동차를 타고 벽수산장으로 가는 윤덕영을 상상해 볼 수 있겠죠.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아치 형태의 부재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문의 일부로 2014년에 건축 과정 중 우연히 발견되어 저런 식으로나마 보존되고 있습니다. 당시 동네 주민들은 입구에 돌기둥과 철문이 있다는 이유로 벽수산장 권역을 돌문안이라 불렀고, 건물은 지붕이 삐죽하다는 이유로 빼죽당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벽수산장 터/한옥 별채>
이 한옥은 1919년에 궁궐을 짓는 건축가, 즉 도편수를 데려다 지었기 때문에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몇 해 전 대한제국의 국권이 빼앗긴 1919년 윤덕영은 왕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신의 집을 가장 화려하게 지었습니다.(조선시대에는 궁궐보다 높은 지대에 일반인이 집을 지을 수 없는 법이 존재하였음)

이 한옥을 누군가는 한옥 별채, 누군가는 소실댁이라 부르는데, 두 개의 기사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한옥 별채였다는 설에 힘이 실립니다. 첫째, 윤덕영이 벽수산장을 과시용으로 지었고 벽수산장 옆에 본인이 거주할 한옥을 지었다는 기사. 둘째, 개벽지에 몇 해 전 이성녀가 윤덕영의 소실로 들여졌다는 1924년 기사.

이 한옥이 복원될 당시, 건물은 낡았지만 궁궐의 건축 양식이 보이고 윤씨 가옥이라 불렸기 때문에 순정효황후(순종의 비)의 생가라 여겨져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남산 한옥마을에 새로이 복원되었는데, 후에 윤덕영 소유였음이 밝혀져 순정효황후의 생가에서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정정되게 됩니다. 2020년 주거환경 개선 차원에서 이 가옥을 매입하였고 현재는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현재 필운대로 9길로 불리는 이 길은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엉컹크 길”이라고.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온 이름으로 벽수산장이 전쟁 이후 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본부로 사용되면서 불린 이름인데 증언해 줄 세대가 사라지면 사라지게 될 이름입니다.

필운대로 9길 15,16,17,18은 벽수산장의 건물이 있던 곳입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인왕산 아래 빈터에 무허가 집, 일명 판자로 지은 하꼬방을 짓는 동안에도 이곳에는 벽수산장이 자리하고 있어서 판잣집이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화재 이후 신탁은행에 불하된 땅이 100내지 150평씩 개인들에게 팔려 고급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박노수미술관>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은 집으로 1938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절충식으로 지어진 2층 양옥 형태입니다. 1973년에 박노수 화백이 매입하여 2011년까지 40여 년 거주 후 종로구에 작품과 함께 기증되었고, 2013년 미술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박노수 화백의 거주 후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이 잘 되어 있지만, 윤덕영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윤덕영의 딸에 대한 사랑의 크기는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가옥 뒤편의 계단과 정원의 돌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도 벽수산장의 흔적입니다.

<마무리하며>
2만여 평의 벽수산장의 흔적은 이제는 박노수 미술관과 바람에도 무너질 듯한 한옥 별채뿐이라는 게 많이 아쉽습니다. 일제강점기 친일 인사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건지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오랜 논란거리입니다.

부정적이면서 어두운 유산도 보존되어야 할 유산의 범주에 포함시켜 우리 후대가 기억하도록 기록되어야 합니다. 경교장이 처음에는 친일 사업가가 지은 건물이었음에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후에 김구 선생이 머무른 곳이자 상해 임시 정부의 마지막 청사로서의 역사를 담고 있어 그 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윤덕영도 벽수산장도 기록되어 부정적 의미의 유산으로서 역할이 잘 수행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