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을에 살았던 여류예술가 먹고, 살고, 사랑하고(Eat, Live and Love)
문화·예술·역사
이지형
서촌
2023-10-19
코스 :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금천교시장)→체부동 성결교회와 금오재(서울생활문화센터 체부)→손호연 시인의 집→천경자 집터→노천명 집터→통인시장→진명여중고교터

주제 : 평범한 동네시장 길을 따라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녀들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금천교시장)>
동네 이름을 따서 ‘적선시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 금천교 시장은 2011년 ‘서촌’을 ‘세종마을’이라 부르게 되면서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금천교시장의 이름은 시장 앞 횡단보도에 놓여진 고려 충숙왕(재위 1313~1330년)때 지어진 한양에서 가장 오래된 3개의 아치가 있는 홍예교(무지개다리) 형식의 돌다리인 금천교에서 유래하였다.

금천교는 본래 왕릉이나 궁궐 초입에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걸려 있는 다리인데 이 근처에 왕을 호위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금위영이 있었던 이유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18세기 수선전도 등의 지도에는 금청교로 표시되어 있다. 1928년 도로확장공사로 인한 복개공사로 매몰되어 지금은 볼수 없다.

낮과 밤의 모습이 사뭇 다른 이 곳. 낮에는 점심식사를 위한 직장인들과 관광객들로 가득 차고 배화여고, 배화여대 학생들의 등하굣길이면서 밤에는 회식등 각종 모임으로 늘 붐비는 서민들의 거리이다.

<체부동 성결교회와 금오재>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로 들어가면 오른쪽 두 번째 골목에 빨간색 벽돌건물인 ‘체부동 성결교회’가 나타난다. 1920년 방 한칸에서 기도 모임으로 시작해 신자들의 모금으로 1931년 정식교회가 세워졌으며 몇 번의 증축과 개축을 거쳐 프랑스와 영국양식의 근대건축양식과 한옥이 혼재된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되었다. 2020년 5월, ‘체부동 성결교회’가 ‘서울생활문화센터’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본관 ‘체부홀’은 각종 생활예술 오케스트라 및 동아리를 위한 연습실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과거 교회의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한옥을 개축한 `금오재’가 있다. ‘금오재’라는 이름은 예전에 교회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다섯 아이들과 기도를 드렸다 하여 지어진 것으로 현재 ‘사랑’이라는 이름의 세미나실과 ‘마실’이라는 마을카페가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한때 외국 사업자에게 매각될 위기에 처했었으나 주민들과 신자들의 요청으로 서울시가 매입 하여 귀중한 유산을 지킬수 있었다.‘체부동 성결교회’는 2014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7년 서울시 최초로 가치있는 건축물에 부여하는 `우수건축자산’ 제 1호로 등록되어져 있다.

<손호연 시인의 집>
종로구 필운동 90번지. 1958년부터 손호연 시인과 큰 딸 이승신 시인이 함께 머물렀던 이곳은 본래 300년이 넘은 고택이 있던 자리이다. 도로에 일부 편입된 한옥이 도로확장으로 철거되면서 새롭게 ‘THE SOHO’라는 이름의 복합예술공간이 세워졌는데 피카소와 샤갈의 진품을 전시했던 갤러리겸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었고 현재는 `호연글방’과 호텔인 `Soho Residence’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유일의 단가시인인 손호연 시인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최고의 단가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가’는 일본의 정형시로 `와카’라고 하며 31음절로 이루어진 일본의 대표적 시문학의 형태이다. 손호연 시인은 1923년 일본에서 태어나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도쿄국제여자대학에 유학하면서 사사키 노부쓰나에게 사사하며 60여 년 동안 2000수 가량의 시를 썼다.

‘THE SOHO’ 벽에는 손 시인의 단가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 이는 2005년 한일 정상회담때 고이즈미 총리가 손호연 시인이 한국과 일본의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과 평화의 구름다리 역할을 했음을 언급하며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비록 일본어로 쓰여졌으나 1400년 전 백제에서 온 도레인이 가르쳐준 향가가 단가의 뿌리임을 알고 민족시인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한국적 정서가 담긴 시를 썼고 손호연 단가연구소 이사장 겸 딸 이승신 시인은 어머니의 작품을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한 책을 냈다.

올해가 손호연 시인의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1월 7일 THE SOHO에서는 기념식과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천경자 집터>
종로구 누하동 176번지. 꽃과 나비와 여인을 그린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가의 집터이다. 지금은 그때의 나즈막한 예쁜 한옥이 사라지고 회색벽돌의 건축설계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미리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내표시 하나 제대로 없는 이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유리문에 이곳이 천경자의 화실로 쓰여졌던 곳이라는 글과 사진 한 장이 확인해 줄 뿐이다.

이 좁은 골목에 수묵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 화가와 이웃하며 살았던 천경자 화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후 이곳으로 이사와 누하동 오거리 주변에 사는 지인들과도 교류하며 가장 안정적이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 네 자녀를 키우며 살았던 힘든 그림인생이었지만 타히티를 비롯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풍물기행을 남기고 종군화가단에도 참여하였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 2015년 8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경자 화가가 1998년 기증한 93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상설 전시장이 마련되어져 있다. 동양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채색화를 고집한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그녀만의 화풍은 해방 이후 한국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노천명 집터>
사슴의 시인인 노천명 시인이 1949년 부터 1957년까지 살았던 누하동 225번지이다. 과거 노천명 시인의 집은 아담한 한옥이었으나 지금은 개량한옥인 ‘이화한옥’이라는 게스트 하우스가 되었다.

본명은 노기선, 6살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늘이 준 목숨이라 하여 천명으로 개명하였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알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을때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사슴’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보 기자로 있을 때는 전쟁을 찬양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친일관련 시를 쓰고 6.25때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 수복 후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징역 20년형을 받았지만 지인의 도움으로 6개월만에 사면되었다. 그 후 이곳 누하동으로 이사를 와 지내다 재생불량성 빈혈과 백혈병으로 4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본래의 한옥 그대로 잘 보존되다가 2017년 전면 수리라는 이유로 고쳐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화한옥’ 간판 아래 ‘시인의 집’이라는 문구와 가끔 창 너머 보이는 ‘사슴’ 시 한 페이지가 노천명 시인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통인시장>
1941년 효자동에 사는 일본인을 위한 공설시장으로 출발한 통인시장은 6.25 전쟁 이후 인구증가로 1960년대 후반 창고형 공설시장을 개축해서 자하문로 앞에 효자아파트를 건립하고 그 옆 골목에 노점과 상점이 생기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통인시장이 유명해진 계기는 2012년 1월에 문을 연 엽전을 이용한 도시락카페이다. 500짜리 엽전 10개가 한 꾸러미를 고객센터 2층에서 구입하고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받아 사진과 같은 표시가 있는 곳에서 엽전으로 먹거리를 구매하면 된다. 고객센터 2층에서 밥과 국도 판매하므로 그곳에서도 식사할 수 있다. 남은 엽전은 환불해주고 엽전에 한국관관공사라고 표기되어 있어 한 개쯤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어도 좋다.

또 하나 통인시장의 명물은 기름떡볶이집. 간장기름 떡볶이와 고춧가루 범벅 매운 떡볶이, 거기다 모듬전까지 있다. 통인시장에는 두 곳의 기름떡볶이집이 있는데 하나는 1956년 실향민 맹할머니에게서 비법을 전수 받은 김임옥 할머니의 ‘최초원조할머니집.’ 지금은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곳은 구 ‘효자동 옛날떡볶이’인 ‘원조 정할머니 기름떡볶이.’이며,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방문 시 들러 유명해진 곳이다. 두 곳 모두 많은 방송에 출연했으며 ‘최초원조할머니집’은 신당동 떡볶이 골목과 더불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하는 맛있고 재미있는 통인시장은 현재 70여개의 점포가 운영 중이며 매월 셋째 주 일요일은 휴무이다.

<진명여중고교터>
진명여고는 영친왕의 모친이자 고종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 엄씨(엄귀비)에 의해 1906년 4월 21일에 세워진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이다. 일본이 황실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려하자 평소 교육의 뜻을 가지고 있던 엄귀비는 1천3백여평의 땅을 하사하여 동생 엄준원에게 옛 창선궁터에 진명을 설립하게 하였다. 더불어 1905년에는 양정학교를 1906년 같은 해에 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87년 진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전환하면서 1989년 8월 명문사학 신시가지 유치계획에 따라 종로구 창성동을 떠나 지금의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2019년 11월 1일에 학교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총동문회 이름으로 창성동 67번지 옛터에 표지석를 세우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역사적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표지석에는 과거 많은 국제대회나 음악회, 체육대회를 개최했던 강당인 ‘삼일당’의 사진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가 새겨져 있다.

‘부덕을 쌓고 학업을 닦아 나의 빛으로 겨례와 온누리를 밝게 비추어 전진한다’는 ‘진덕계명’ 의 설립정신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을, 1930년대에는 농촌계몽운동과 문자보급운동을 하며 지금까지 사회에 기여하는 많은 여성인재들을 키워내고 있다. 졸업생으로는 3회 화가이자 문인인 나혜석, 20회 시인 노천명, 30회 단가시인 손호연, 우리가 잘 아는 KBS 뉴스 신은경, 노현정 아나운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