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마을 각자(刻字)이야기
문화·예술·역사
이미숙
서촌
2023-10-15
코스 : 백운동천 각자→청송당유지→운강대→백세청풍 각자→옥류동 각자→송석원

주제 : 인왕과 북악 자락의 수련한 청풍과 동천이 빚어낸 각자 바위가 품은 이야기를 살펴보기

<백운동천 각자>
*각자(刻字)-바위나 나무에 새긴 글자.
*동천(洞天)-산과 내로 둘러쌓인경치 좋은 곳.
*우리나라 각자 문화
조선 중기부터 유람이 성행한다. 유람 중에 경승지에서 받은 감흥이나 여운을 시나 문장으로 표현하여 그 주변의 바위에 각수(刻手)를 불러 새기도록 하였다. 자신의 터나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에 평소 좋아하는 글귀나 남기고 싶은 내용을 새기었다.

‘백운동천(白雲洞天)’각자(刻字)는 애국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이 그의 집터 바위에 1903년에 새긴 그의 글이다. 아름다운 흰 구름이 백운동을 감싸고 돌아 흘러 내려오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바로 이상향이며, 신선이 살 만큼 경치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청송당유지>
* 조선 선비 성수침의 세칸 서실.
* 청송의 뜻 - 소나무에 바람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 유지(遺址)는 터를 의미
* 성수침이 ‘기묘사화’때 스승으로 모시던 조광조를 비롯, 많은 선비와 벗들이 화를 당하자 세상과 담을 쌓고 시은(市隱, 도시은둔자)의 삶을 살며, 수양하면서 제자를 기르던 곳. 성수침의 문집<청송선생집>에 의하면 청송당은 눌재 박상이 지어준 것.

조선 중기 문인 임억령은 <청송당기>에서 성수침이 의롭지않은 명예와 벼슬등에는 뜻을 두지않고 청송당에서의 초연한 삶을 서술했다. 청송당은 성수침 사후 폐허가 되고 남의 손에 넘어갔다가 외손들과 우암 송시열이 중건한 후, 이를 기념하는 시회를 연다. 성수침이 절의(節義)를 지키며 키워낸 이이, 성혼의 학풍을 계승한 후학들에게는 ‘청송당’이 대대로 하나의 성지로 인식되었다. 19세기경 ‘청송당’은 사라지고 ‘청송당유지’ 각자만 남았다.

<운강대>
* 선조 때 승지(承旨)를 지낸 조원의 집 터
* ‘운강(雲江)’은 조원의 호.
* 조원은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송강 정철, 율곡 이이, 우계 성혼등과 막역한 지교였다.

조원의 두아들 희정과 희철이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부터 어머니를 지키려하다 목숨을 잃는다. 그러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조원의 본가 앞에 쌍홍문을 세운다. ‘효자동’이란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백세청풍 각자>
* ‘백세청풍’ - 길이길이 오랜세월 밝고 곧은 절개의 의미로 청풍계(淸風溪)터 바위 글씨
* 주자의 글씨로, 고죽국(상(은)나라 제후국중의 하나)의 왕자 백이, 숙제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 상나라를 멸하고 세운 주나라를 부정하며 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고사리도 주나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마저도 먹지 않아 굶어 죽는다. 이러한 절개를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그들의 사당 비석에 새긴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중기 학자 정윤목이 19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신으로 가는 길에 따라갔다가 들른 백이, 숙제 사당의 비석에 새겨진 ‘백세청풍’ 글귀에 크게 감명받아 실물 크기로 베껴와서 조선에 유행한다. 그 후, 사대부들이 고택의 현판이나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 곳에 조성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즐긴다.

<옥류동 각자>
* 옥류동은 장안에서 명승지로 손꼽혔던 곳으로 고관들의 별서가 곳곳에 들어서고 연회와 시사(詩社), 아회(雅會)가 그치지 않았던 장소이다.
* 시사 - 문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친목을 다지고 풍류를 즐기기위해 정기적으로 모여 시문을 창작하는 모임
* 아회 - 아취가 있으며, 대개 시문을 짓기위하여 갖는 모임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가 조선후기 작성한 서울역사지리서 <한경지략>에 ‘옥류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계곡사이에 시냇물이 흐른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영조 때 조성한 <도성대지도>에는 인왕산 아래의 수원처(水源處)로 표시되어 있다.

‘옥류동’ 각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 김수흥, 김창협등 안동 김씨의 후손 중 하나라는 이견도 있다.

<송석원>
* 송석원은 조선 후기 시인 천수경의 집 이름으로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예서체 글씨(1817)이다.
(송석원 각자는 막후의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의 세로글씨와 함께 각자 된 것을 기반으로 그 터로 추정되고 있다.)

천수경은 중인 계급으로 그의 벗들과 ‘송석원시사’ 혹은 ‘옥계시사’ 모임을 갖는다. 모두 훈장이나 규장각서리등 글(한문)과 관련된 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13명이 시작한 시사는 30년을 넘도록 이어졌다. 그들은 1791년 유두날 아홉명이 낮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는다. 양반인 추사 김정희에게 송석원 글씨를 의뢰하고, 궁중화원인 이인문과 김홍도에게 그들 모임의 그림을 의뢰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들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여항문학이나 백일장 품평회 등에서 18세기 조선사회의 학문이나 지식은 사대부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영,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일어난 일종의 문예활동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