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마을 속 장소 그리고 역사 이야기
문화·예술·역사
김은희
서촌
2023-10-13
코스 : 수성동 계곡→윤동주 시인 하숙집 터→박노수미술관→송석원 터→자수궁 터→청전 이상범 가옥

주제 : 세종마을 골목 속 역사와 이야기를 통해 세종마을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이해하기

<수성동 계곡>
조선시대 한양에서 알아주던 명승지였던 수성계곡은 ‘물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하여 물 수(水)에 소리 성(聲)를 써서 ‘水聲(수성)’으로 이름 지어진 곳이며 조선초기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의 집 ‘비해당(匪懈堂)’이 있던 곳입니다.

시와 글씨, 그림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안평대군은 당대에 많은 문인 예술가들과 이곳 ‘비해당’에서 함께하며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계유정란’때 모두 불태워지고 안타깝게도 남겨진 것이 없습니다.

1971년에는 이곳에 옥인시범아파트가 건립되어 장안의 화재가 되기도 했지만 인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리는 애물단지가 되어, 2008년 마침내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수성동>을 근거로 하여 2012년 아파트 철거가 마무리되면서 지금의 ‘수성동 계곡’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 하숙집 터>
이곳은 윤동주 시인이 1941년 4월~9월까지 약 4개월간 하숙했던 집터로 시인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 작가의 집이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 중 ‘조선 독립을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되어 광복을 반년 앞두고 27세(1945.2.16)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뇌일혈로 죽은 윤동주 시인이 조선 땅에 머문 시간은 평양에서 6개월, 연희전문학교 시절 4년이 전부이지만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등’ 대부분의 시가 이 시기에 지어졌고 1930년대 많은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변절하는 사태 속에서도 한글만으로 아름다운 시어를 쓰고, 죽는 날까지 문학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박노수미술관>
이곳은 종로구 최초의 구립미술관으로 ‘남정 박노수 화백’의 기증 작품과 소장품을 전시하여 2013년 9월에 개관한 ‘박노수미술관’이며, 근대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학적 의미가 있는 집이라고 합니다.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로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한옥과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이 절충된 독특함이 엿보이는 건물은 지은지 80년이 넘는 건물입니다.

1, 2층에는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노수 화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뜰에는 박노수 화백의 흉상, 그림들과 바꿔서 마련했다는 석상과 수석으로 꾸며져 있으며 뒤뜰 계단을 올라가면 세종마을의 풍경도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있어 소정의 입장료(3,000원)로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송석원 터>
이곳은 조선 후기 최대 권력 가문이었던 ‘장동’ 김씨들이 살던 터로 노론의 수장 ‘송시열’이 ‘물결이 구슬처럼 곱다’란 뜻으로 ‘玉流洞(옥류동)’ 이란 한자를 각자한 바위가 있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수성동 계곡, 청풍계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였고 양반 세도가들이나 드나들던 곳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거치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중인들이 ‘위항문화(委巷文化:꼬불꼬불한 골목, 동네문화)’ 꽃피워, 그 선두 주자인 천수경이 송석원을 짓고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라는 시모임을 만들어 ‘위항문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곳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윤덕영’이 프랑스 르네상스풍의 대저택 ‘벽수산장’을 지은 곳도 송석원입니다.

<자수궁 터>
자수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7남 이방번(무안대군)의 집을 문종 때 수리하여 세종의 후궁들이 머물게 한 궁으로 후대에는 선대왕들의 후궁 거처로 활용된 곳입니다.

인조반정 후에는 자수원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한때는 5,000명의 여승이 살았다고 합니다. 현종 2년(1661년)에는 여승의 폐해가 심하여 자수원을 폐지하고 북학을 세웠고, 영조 40년(1765)에는 자수원을 헐어 그 목재를 성균관 별당(도서관) 비천당(丕闡堂)를 지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왕의 후궁들은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궐을 떠나 대부분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왕비의 삶도 힘이 들었겠지만 후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스트레스의 연속이지 않았을까요?

<청전 이상범 가옥>
청전 이상범(1897~1972) 가옥은 2006년 서울시에서 매입 후 2008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2년 7월에 개방하였습니다.

전통적인 묵화기법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한국 산야와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 화법으로 구현한 대표적 산수화가로 우리 근대 화단의 거장으로 손꼽히며 당대 최고의 지위를 누렸고, 1936년 <동아일보> 재직 시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한 신문’에 연루되어 강제 해직과 복역까지 하여 마치 민족정신을 고취한 민족 지사처럼 평가받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문화정치의 첨병인 ‘조선미술 전람회’에 깊이 관여하여 앞장선 것과 친일 작품을 신문에 게재한 것 등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미술부문에 친일미술인으로 올라 역사적으로는 그리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인물입니다.